나사니엘 호손 단편선

어제 수능이 있었던 날이었다.  제대로 된 통과의례라고 보기는 힘들지 모르지만 듣기평가가 진행되는 시간에는 국가적으로 비행기도 뜨지 못하게 만드는 대단한 연례행사임은 틀림없다.개인이 쌓아온 노력과 의지를 짧은 하룻동안 모두 쏟아내고 오는 길이 그렇게 시원섭섭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허탈감, 공허함,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2003년도 첫번째 수능을 보고 돌아온 날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능 보기 전에는 이런 긴장감을 어떻게 눌러왔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씁쓸한 공허감이 온몸을 지배하고 놔주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반대로 04년 두번째 수능을 볼 땐 그 반대로 시험을 보기도 전에 개인의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있는 것인지 그날따라 왜 그렇게 절실히 느껴지던지 2시간도 못 자고 시험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던 아찔한 기억도.

 

수능 자체는 앞으로 펼쳐진 온갖 단계에 딸려오는 어려움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수능만을 보고 달려왔던 어린 아이들에게 처음 다가오는 '목표의 종말'과 '새로운 목표의 탐색'이라는 강박이 얼마나 가혹한지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취와 절망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세계의 끝이라고 여겨졌던 수평선도 훌쩍 뛰어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공간이라고 여겨졌던 우주 공간까지 나아가는 인간의 끝없는 움직임은 '죽음'이라는 한계에 부딪히면서 더욱 불타오르기도 하고 혹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의 철로를 따라가기도 한다. '나사니엘 호손'의 단편들은 인간의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외적 모습과는 달리 내적으로 깊숙이 숨어있는 어두운 두려움이라는 본능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지 일깨워준다. 12편의 단편들은 다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데, 그렇게 미국문학에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이 글들의 독특하고 환상적인(네거티브하게) 내용과 이를 끌고 나가는 리얼한 묘사 그리고 무언간에 도취된 듯한 긴 문장들이 애드가 앨런 포와는 혹시 뭔가 같은 기류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책을 읽으면서 어둠과 안개가 공존하는 초새벽의 관목림에 의기양양하게 들어가서는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 검은 안개 속에 나 자신까지 잃어버린다...... 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자가 호흡이 길고 유려한 문장들의 흥을 살리기 위해 번역하면서 문장을 똑같이 길게 늘여놓았기 때문에 같은 페이지에서 걸음을 되풀이해야 했던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끝없는 욕망과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어느샌가 찾아오는 좌절의 낭떠러지 앞에서 쉽게 멈추지 못하는 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자유 의지가 강한 나머지 자신의 발목을 살며시 움켜잡는 삐딱한 운명의 질투조차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치료약이 될지도 모르겠다.

 

.... 시인이든 다른 매체를 사용하는 예술가든 아름다움을 내면적으로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후딱 사라져사는 그 신비를 그의 영적인 영역의 경계 너머까지 쫓아가서 그 가녀린 신비를 육체적인 힘으로 움켜쥐어 결국 찌그러뜨려야만 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들의 풍요로운 환영을 만족스럽게 재현하지 못해서 더 흐리고 더 희미한 아름다움 속에 이 세계를 장식할 수 밖에 없었던 많은 시인들과 화가들이 그랬듯이 오웬 워랜드도 그의 생각을 외적인 실체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中

 

.....그 젊은이의 성격의 비밀은 높고 추상적인 야망에 있었다.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무덤 속에서 잊혀지고 말 삶은 참을수 없었다. 간절한 욕구는 희망으로 변하고 오래 간직해 온 그 희망은 하나의 확신으로 바뀐 것이었다. 즉 후세 사람들이 과거의 어둠을 뒤돌아보게 될 때, 그들의 하찮은 영광들이 사라져갈 때 더욱 빛나는 자신의 밝은 발자취를 추적해서 결국 한 재능 있는 인간이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일 없이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자신의 여로를 마치고 갔음을 밝혀주게 될 것이라고... '야망이 큰 손님' 中

 

..... 운명은 우리를 그처럼 어긋나게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또한 열정은 제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왈칵 달겨들면서도 정작 적절한 상황이 그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때에는 뒤에서 미적거리면서 게으름을 피운다..... '라파치니의 딸' 中

 

..... '그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게 뭡니까?' .................... '마음 딴곳에서 자란 것이 아니오 그건! 인간에 대한 우애와 시에 대한 존경의 생각을 물리쳐 이기고 자신의 강력한 요구에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그런 지적 죄악이 바로 그것이오. 영원한 고뇌의 응보를 받아 마땅한 유일한 죄악이지! 다시 또 그렇게 된다 해도 난 그 죄를 거침없이 범할 것이오. 그리고 그 응보를 당당히 받아들일 것이오! ........... '이선 브랜드' 中

 

by 햏리포타 | 2007/11/17 16:10 | Reading | 트랙백 | 덧글(3)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지금보다 어렸을 때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을 읽고서는

특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며칠 동안 멍하니 지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서점에서 레이아웃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팔리고 있는 한국판 책을 보면

가슴이 뭔가 허전한 것이, 찡해집니다.

 

글제목에 굳이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달아놓은 이유는

읽기도 전에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는 제목의 한국어판 '상실의 시대'을 다시 읽은게

아니라 새로운 기분으로 문고판 원서로 천천히 읽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어 소설 원문을 읽는다는 게 그리 자랑도 아니지만 만화나 애니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누구도 아니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기 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해왔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일본어로 '노르웨이의 숲', 스페인어로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는 게 로망이라면 로망이었던지라 스페인어로 백년의 고독을 언제 읽을 수

있을지는 까마득해도 최소한 전자는 이루어 냈으니까 시원섭섭하다는..

 

물론 이 책을 조용히 오랜 시간동안 읽고 나서 느꼈던 허전함 외로움 그리고 '상실'이 그러한

성취감을 조용히 구석으로 몰아내버렸지만 말이죠.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노르웨이의 숲'은 특별히 애매모호하지도 않고

특별한 문학적 장치가 있어서 읽는 사람들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소설도 아닙니다.

(다른 관념적 사고가 녹아들여져 있는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

극중 여주인공들이 하는 말대로 정말 이상한 '화법'을 가진 와타나베가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씨 그리고 부수 인물 (키즈키 돌격대 카나자와 등)과 함께

69년을 통과하면서 겪는 일들이 성에가 낀 창문을 부드러운 천으로 걷어내듯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서술되면서 그들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게 만들었던...

 

예전에 한 국내 원로문학작가가 하루키의 이 소설을 예로 논하면서

퇴폐작가 운운하면서 젊은이들을 현혹시킨다고 목에 핏대 세우고 비판했었는데

그렇다면 이 분도 성인소설에서 성애 장면만 발췌독하는 미성년들이랑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건지 의문이 들었다죠 -_-

 

그렇다면 나는 왜 두번 씩이나 이 책을 읽지 않고는 안 되었는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참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 하기엔 우리가 너무 어리고

지키고 싶은 것들을 완고하게 붙들기에는 너무 여린 청춘들을 조용하게 달래주는 것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가 아닌가..

 

여기서 부턴 나름 안 본 분에겐 스포이지만,

 

처음 읽을 때는 와타나베의 발화랑 행동들에만 몰입을 해서 책의 묘미를 절반은

덮어버렸었는데 2번째 읽을 때는 나오코가 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레이코 씨가 왜 굳이 도쿄에 와서 주인공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깊이 더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소설 초반에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를 지금 외롭게 만드는 것은 그 당시

나오코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쓸쓸하게 독백하는 장면에서

'아냐 나오코는 그래도 당신을 좋아했자나'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던 옛날에 비해서

나도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거 같아서 조금은 슬펐다는 ㅠ

 

by 햏리포타 | 2007/11/17 00:50 | Reading | 트랙백 | 덧글(2)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이 논란의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아 느끼고 생각해 본 것들을 적으려면 레폿이 하나 나오겠구나' 정도의 막연함이었다.

무신론에 대한 경쾌하고 거침없는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보다 적극적인 무신론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한층 더 불가지론의 수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나 할까.

 

인터넷 서점 사이트마다 각자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열성분자들의 뜨거운 리뷰들로 넘쳐난다. 책을 사지도 않고 한 장도 넘겨보지도 않고 사탄의 책이니 읽지 말아야 한다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부터, 오히려 이렇게 조목조목 '신은 없다'는 근거를 과학적,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책을 읽으면서 올바른 신앙심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신자, 책을 보고 종교적 관용의 의미에 대해서 모색을 해보는 사람들 까지 실로 다양해서 책을 다 읽고 나서 리뷰들을 한 번 훑어보는 게 더 흥미로울 정도였다.

 

다른 이들의 리뷰(YES24)

 

각자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쓸 건 볼 때 재밌는 것은 많은 이들이 나는 무신론자인데,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나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인데 등으로 일종의 자기 고백으로 글을 시작한다는 거다. 굳이 그렇게 해서 리뷰를 읽는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은 신자니까 이렇게 이렇게 읽었구나, 이 사람은 무신론자 이니까 이렇게 이렇게 쓸 수 밖에 없지 와 같은 일종의 선입견을 통한 빠져나갈 구멍을 파놓는다고 할까. 나는 분명히 이 책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 책은 많은 종교에서도 유일신, 인격신을 내세우는 기독교를 이슈의 중점에 놓는다) 그리고 비신자 모두에게 많은 함의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처음 넘기면서 재밌었던 것은 이 책이 영화 '컨택트' 같은 광활한 우주에 대해서 느끼는 인간의 외경, 물리학자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디자이너'로서의 신의 존재에 대해서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들 간의 분란과 다툼을 야기하는 '인격신'에 대한 집요한 공격의 글이라는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는 본질적으로 신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자유의 뜻을 왜곡하고 불관용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신의 부재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 제임스 왓슨이 책을 추천하면서 남긴

'열의에 찬 종교적 비합리성이 인간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 세계는 신앙에 두려움없이 도전하는 열의에 찬 합리주의자들을 필요로 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 책에서 예리한 지성을 통해 그 일을 해낸다....'라는 말에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책의 수많은 내용 중 가장 인상깊고 발췌독을 권하는 부분은

 

인간의 도덕의 뿌리는 결코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아이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것만큼 치명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없다는 것 이렇게 두 가지이다.

 

신은 없어도 인간은 충분히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  도덕의 주춧돌이라고 자부하는 종교가 어떻게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서로 증오하고 서로 죽이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많은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이지만 도킨스는 한발 더 앞서가서 이타적인 본성을 가진 순수한 인간의 마음을 종교가 어떻게 왜곡시키고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만들었는가 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다. 단순히 광적인 근본주의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가르침 안에 내재되어있는 폭력과 증오의 코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순수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책에서 수없이 제시하는 구약성서의 폭력성은 둘째치더라도 기타 다른 종교적 가르침의 기만은 앉아서 당신이 불신자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오만한 신자들의 독설을 참고있지만은 않게 만들 것이다. 종교와 도덕의 뿌리에 대한 고찰은 이 책을 충분히 읽어볼만 하게 만든다.

 

그리고 상호 배타적인 종교를 아이들에게 강요하면서 다원주의적 종교 교육을 배척하고 진화론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미국의 몇몇 이상한 기류에 대해서 도킨스는 직격탄을 날린다. 아이들이 '우월함'이라는 유일한 가치를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자라났을 때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단순히 미국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종교관에 상호배타성을 덧씌우는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손에 성조기까지 쥐어주면서 광장에서 반공을 외치는 이상한 사람들은 막상 성조기의 주인공인 미국 사람들까지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니까.

 

황금나침반의 저자인 필립 풀먼은 지면을 빌려 종교를 비판한다는 것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 등의 인간 본연의 가치를 찾는 일이라고 하였다. 오병이어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일상 생활의 자기 주변에서 신을 느끼면서 성실히 살아가는 신자들을 나는 존경한다. 또한 건전한 신앙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올바른 길을 걷는 이들을 존중한다. 종교는 사면부가 아니다. 모든 자유가 free ticket이 아닌 것처럼 종교적 자유도 종교적 다원성과 관용 아래에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막상 아무 말도 없는 신 아래에서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얼마나 오만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보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책에 인용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마지막으로 리뷰는 마친다.

 

이곳 지구에서 우리는 입장이 좀 묘하다.

우리 각자는 잠시 이곳에 들를 뿐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이곳에 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하여.

by 햏리포타 | 2007/10/16 23:31 | Reading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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